고대인의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해야 할 기당 현상윤의 삶

-흔들림 없이 민족 교육에 매진했던 초대 총장-
 

지금 고려대 학생 중에서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낸 기당(幾堂) 현상윤(1893-1950?)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는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격동의 19세기 말, 즉 1893년 평안도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당대의 민족 교육과 근대 교육을 두루 받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살지 않고 민족 교육에 몸을 던졌다. 그의 대쪽같은 성품과 선공후사(先公後私) 하는 삶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는 교육자로서의 자질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나는 사람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데도 기당선생만큼은 정말 흠이 없는 분입니다. 내가 모신 여러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기당입니다. 그 분은 인품과 덕으로써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니 아래 사람이 저절로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김성식 사학과 교수 회고, 1985


“내가 만난 선생님들 중에서 가장 점잖은 분이 기당선생이었어요. 기당선생께서는 완고한 일면이 있었지만 그 완고함이 대부분 강직과 청렴이었지요. 그 분은 언제나 외모에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점잖으셨으며 신의가 돈독하신 진짜 선비였습니다” 
당시 학생이던 김진웅 선생 회고, 1985


평생의 화두가 된 ‘민족’

그는 189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현석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전통 한문 교육을 받았지만 17세에는 윤치호가 교장을 맡고 있던 평양의 대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자주독립 사상과 항일정신을 배웠다. 기당이 2학년이 되던 1910년 ‘한일병합’을 목도하고, 2년 뒤 소위 ‘105인 사건’으로 대성중학교가 강제 폐교되면서 고려대학교의 모체인 서울의 보성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 후 기당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18년 다시 귀국하는데 이때는 바로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기당은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귀국해서도 당시 인촌이 경영하고 있던 중앙학교에서 숙식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들려온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거국적인 독립운동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 계동 중앙고등학교에는 “3.1운동책원지(策源地)”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이들의 막후 활동과 거사 과정은 기당이 생전에 노트에 기록을 남겨두었는데, 그것이 1963년 <사상계(思想界)> 3월호에 발표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기당과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는 천도교의 최린, 기독교의 이승훈,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최남선을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당은 이 3.1운동으로 인해 2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고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이었던 결핵에 걸려 8년이나 낙향하여 요양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불굴의 정신으로 이겨내고 다시 상경할 수 있었다.   

  
1950년 1월 20일 기당(뒷줄 가운데)이 3.1운동 민족대표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민족대학의 총장으로서 고려대학의 기풍을 세운 장본인

1945년 해방 후 기당은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경성대학 예과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정계진출을 하게 된 인촌의 요청에 의해 보성전문대학으로 옮겨 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8월 15일 고려대학교로 승격되면서 기당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기당은 늘 공과 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항상 공(公)을 앞세웠다. 예를 들어 총장에게는 차량이 제공되고 있었지만 휴일이나 개인적인 용무에는 절대로 총장 차량을 이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출퇴근도 총장 차량이 아닌 교수들이 이용하는 출퇴근용 미군트럭을 같이 타고 다니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연말연시나 명절이 되어 선물이 들어오면 곧바로 돌려보내고 두고 간 선물의 경우에는 가족들을 시켜 그 주인을 찾아주게끔 하여 가족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기당은 권위의식과는 거리가 먼 총장이었다. 기당은 인촌을 비롯한 재단이사들에게 늘 교수들의 월급 인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같은 비율로 인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받는 사람은 조금 인상하고 적게 받는 사람은 많이 인상하도록 주장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총장의 월급과 일반 평교수의 월급이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그리고 늘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 공부에 의심스러운 것이 생기면 한문학의 김춘동 교수나 영미철학의 박희성 교수같은 젊은 교수들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기당의 배움의 자세가 진지하고 겸손했다고 증언한다.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자요 학자이시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고려대학을 반석 위에 올려 놓으신 분입니다. 그 분은 또 아랫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시지 않았습니다.”
박희성 교수 회고, 1985

한편, 기당은 바쁜 총장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강의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강의는 ‘조선사상사’라는 과목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상을 통시적으로 정리한 방대한 작업으로 한문학적 소양과 근대학문에 대한 조예가 없으면 연구가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기당은 이 과목을 문과대에는 필수과목으로 법정대학과 경상대학에는 선택과목으로 지정하여 자신이 직접 강의를 맡았다.
 

2010년 이형성의 역주로 다시 발간된 <조선사상사>와 <조선유학사>
             
 
납북으로 소식 끊겼으나 ‘고려대 제1호 박사’로 남은 영원한 고대인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사상의 대립으로 기어이 전쟁이 터지고 사흘만에 서울은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쟁의 포성이 가까워지는 가운데서도 학교에 출근하여 3개월치 월급을 교수들에게 나누어주고 학교 일을 처리하느라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 한 달 여 간을 지인의 집에 숨어 인민군의 눈을 피했으나 결국 붙잡힌 신세가 되었다. 같이 잡혀 간 사람들 중에는 뇌물을 주고 몰래 빠져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올곧은 성품이었던 기당은 그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비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결국 기당은 그렇게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3년 3월 25일, 대구 원대동에 있는 고려대 임시 교사에서는 제46회 졸업식을 거행하면서 기당에게 문학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기당이 1949년 11월에 민중서관에서 출간한 <조선유학사>가 우리나라의 유구한 유학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대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식이었지만 당사자가 참석하지 못한 채 기당의 아들인 현인섭 씨가 대리 참석했다. 이날 졸업식의 사회를 맡은 변우창 교수가 ‘문학박사 현상윤’을 부르자 장내는 돌연 숙연해지고 많은 참석자들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2005년 공개된 평양 재북인사릉에 현상윤 선생의 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 9월 15일 황해북도 서흥군에서 전쟁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사학위 수여식이 이루어지던 1953년 당시에 이미 기당은 고인이 되었던 셈이다. 

  
현재 대학원도서관 앞에 있는 기당의 흉상

평생을 민족 교육에 헌신한 기당 현상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을 꺾을 수 없었건만 그를 앗아간 것은 같은 민족간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초대 총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강직함과 청렴함은 여전히 고대에 남겨야 할 향기로운 유산임에 틀림없다. 

* 본 기사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고려대학의 사람들 4: 현상윤>(1986)을 크게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