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창설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원장 이진한)은 동북아 지역 연구의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연구기관이다. 고대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성인의 상징, 고 김준엽 선생(1920~2011)은 이 아세아문제연구원(이하 ‘아연’)의 창설과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2023년에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준엽 선생 기념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진한 아연 원장을 만나 김준엽 선생의 일생과 아연과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김준엽 선생과 아연의 인연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아연은 1957년 설립되었는데요, 그 창설부터 아연을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발돋움시키신 것이 사실 김준엽 선생이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준엽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유학 중 징병이 돼서 중국 전선으로 끌려가셨지만 장준하 선생과 함께 탈출을 해서 광복군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이후 미군 OSS 부대와 합동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셨죠. 

 

1945년 임시정부가 귀국을 할 때 선생님도 잠시 귀국하셨다가 다시 중국으로 가서 북경대에 잠시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 중에 양통팡(楊通方) 등이 있었는데 나중에 북경대 교수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90년대말 2000년대 초 고려대와 북경대가 교수를 교환하는 등의 교류를 하게 되는 역할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1949년에 한국에 오셔서 고대 문과대학 사학과에 부임하였고, 51년부터 55년에 대만에 가서 본격적으로 중국사를 공부하셨습니다. 57년에 아세아문제연구원이 민족문화연구원(당시에는 한국고전국역위원회)과 함께 국내 대학 연구소로는 처음 만들어집니다. 그때 선배 교수인 이상은 선생이 소장을 하고 김준엽 선생은 부소장으로 역할을 하시는데 그때부터 30여 년간을 아연에 계시면서 학자이자 연구소 경영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셨지요. 

 


 

아연 60주년사 기념실에서 자료를 소개하는 이진한 원장 

 

 

 

 

김준엽 선생이 아연에서 남긴 업적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김준엽 선생이 북한을 포함한 동아시아 공산권 연구에 관한 펀드를 많이 끌어오면서 고대 아연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동아시아에 공산권 연구를 할 사람이 있을까 하고 알아보고 있었는데, 예전에 OSS로 활동했던 김준엽 선생의 경력이 해외 기금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아연 건물도 1967년에 지어지게 되었는데요, 도서관이나 구법관이 없을 때이니, 당시로서는 서관 다음으로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이곳에서 연구를 하고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자료 사업에도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북한 자료나 구한국 외교문서를 정리해서 활자화하는 작업들을 다 외부 지원을 받아서 했고 1958년에는 최초의 국내 학술지인 <아세아연구>도 창간하는 등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1960년대 한국 근대화와 관련된 전 세계 학자들을 모아서 큰 학술행사를 해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셨죠. 1970년대만 해도 외국에서는 ‘고대는 몰라도 아연은 안다’ ‘아연에 고대가 있는 줄 안다’고 할 정도로 아연의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65년 개최된 '아세아의 근대화문제' 국제학술회의. 정작 회의를 주도한 김준엽 선생은 사진에서 맨 뒷줄 오른쪽에 있다. 

 

 

 

김준엽 선생은 더 나아가 1982년부터 85년까지 고려대 총장을 역임하셨는데요, 이때의 업적도 소개해주시죠.  

 

김준엽 선생이 아연 소장일 당시에 스스로를 ‘작은 거지’라고 했는데, 연구원의 발전을 위해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비럭질을 하는 선생님의 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학 총장이 된 것은 ‘작은 거지’가 ‘큰 거지’가 된 것이었죠. 총장직 4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 두시는데, 정경관, 과학도서관, 구로병원 등의 설립과 같은 굵직한 업적을 남기셨죠. 기부를 많이 받으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주는 사람들 입장에서 김준엽 선생의 인품과 삶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기꺼이 거액을 쾌척했다고 합니다. 

 

 

김준엽 선생이 총장을 하실 때, 처장급 근무자를 임명할 때 재단의 허락을 받는 관례에서 총장이 직접 임명할 수 있도록 하게 되고, 보직을 늘려서 젊은 사람들을 많이 채용하게 됩니다. 또, 당시 ‘짭새’라고 불리는 사복 경찰이나 정보원들이 총장실 지근거리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다 내보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로서 당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 같아요. 

 

 

 

김준엽 선생이 신군부의 압력에 총장직을 중도 사퇴한 사건은 영원한 고대의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가슴에 남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그 얘기도 해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들은 바로는 당시 집권당이던 민정당사 난입 사건에 고대 학생들이 많이 가담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그 가담자들을 다 제적하라는 압력이 들어왔죠. 선생께서는 원칙대로 하자고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정부의 미움을 샀다고 합니다. 교육부 감사가 들어오고 직원 입시비리를 억지로 만들어내서 지속적으로 압력이 들어오니까 김준엽 선생이 결단을 내려서 학생들을 다 구하는 조건으로 사퇴를 하셨어요. 사퇴 발표가 85년 2월 졸업식 무렵이었는데 많은 졸업생들이 총장 반대 사퇴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막 스크럼 짜고 그랬죠. 나중에 김준엽 선생이 ‘총장 물러가라’ 하는 데모는 있어도 ‘총장 물러나지 마라’ 하는 데모는 자기밖에 없었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자랑스러워 하셨다고 합니다. 

 


 
 

 

 

총장직을 사퇴한 이후에 김준엽 선생은 어떤 족적을 남기셨는지요.

 

그 이후에 하신 일 중 하나가 대통령 직선제로 가면서 6공화국 헌법을 새로 만드는데 선생이 강력하게 주장하셔서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정부의 법통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헌법 전문에 넣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또 90년대 들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과 중국의 한국학 진흥 분야에서 큰 활약을 하셨습니다. 한중 수교 이전부터 중국과 교류를 하셨지만 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양국간 교류의 물꼬가 터지자, 중국의 유명 대학들에 한국학 연구소를 만드는 사업을 지원해주셨어요. 선생님이 대기업과 정부를 다니면서 중국에 한국학 연구소가 있어야 한다고 설득해서 10개의 한국학 연구소를 지원해줬고요. 그 연구소들이 중국의 발전과 함께 크게 성장했고 그 연구소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중국의 한국학 연구소끼리 매년 한 번씩 한국학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가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2021년에도 행사가 열렸다고 합니다. 

 

아울러 김준엽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발인을 새벽에 했는데도 중국의 대학 총장들이 장례식에 와서 제가 놀랐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 자기 대학에 끼친 김준엽 총장님의 공로를 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살다보면 몇 번은 욕을 먹고 또 실수를 하거든요. 그렇지만 김준엽 선생은 그런 것들이 참 적은 것 같습니다. 참 강직하셨기 때문에 국무총리 등 고위직을 여러 번 제안 받았지만 다 거절하고 평생을 학자로서 영원한 독립군으로 사셨습니다. 

 

광복군, 고대 교수와 아연 소장, 고대 총장과 정년 이후의 행적 등이 항상 나라와 학교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이타적인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이런 분이 고려대 문과대 교수로서 재직했다는 것은 고려대 문과대인들에게는 굉장한 자랑으로 여길 만하고 고대인의 상, 연구자의 상으로 삼을 만하다고 봅니다. 

 

 

 

김준엽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네요. 아연에서 김준엽 선생 기념 사업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김준엽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1년 뒤에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김준엽 렉처>, <'장정' 읽고 독후감 쓰기 대회>도 했는데 저는 그런 것들도 다시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의 목석 같이 감정이 없는 사람들도 <장정>을 읽으면 김준엽 선생의 인품에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가자를 고대생으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고등학생 등 학교 밖의 사람들에게도 넓게 공모를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은 김준엽 선생이 아연 소장으로 계시면서 하셨던 공산권 연구라든지 한국 외교 문서 연구라든지 업적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한국학을 공부하는 국내 학문후속세대와 외국인 학자를 지원하는 펠로우십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구한국외교문서> 시리즈

 

 

김준엽 선생은 아연뿐만 아니라 문과대에서도 아주 중요한 분인데, 선생을 기리는 사업에 대해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아연의 김준엽', '문과대의 김준엽'에 한정하지 않고 '고대의 김준엽'이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김준엽'이라는 위상을 찾도록 하는데 아연과 문과대학이 기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념사업의 방향도 너무 고대쪽이나 문과대쪽으로 좁히는 것은 김준엽 선생을 작게 만들어버리는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김준엽 선생이 신경쓰셨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잘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전 세계 촉망받는 학생들에게 유학 기회를 주거나 장학금을 줘서 지한파로 만들어야 합니다. 중국에 있는 10개 한국학 연구소와 아연이 다시 끈을 이어야 겠다는 생각에 얼마전에 연락을 해보았더니, 오히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도 그쪽에서는 여전히 매년 회의를 하면서 유지해왔다고 해서 저도 놀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연을 방문한다면 김준엽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고려대 아연은 ‘김준엽의 아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연에는 김준엽 선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습니다. 1층에 들어오자마자 아연의 역사를 보여주는 조그마한 공간이 있는데 김준엽 선생이 포함된 여러 행사 사진과 <아세아연구> 창간호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3층에는 아연 60주년사 기념실에 걸려 있는 사진의 절반은 김준엽 선생님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4층에 있는 <아연 동아시아 도서관>에는 아연에서 북한 및 동아시아 지역 연구를 위해 모은 귀중한 책들이 있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연에 오시면 꼭 들러보시고 독립운동가이자 학자이였던 김준엽 선생님의 고결하고 이타적인 삶과 정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아연 동아시아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