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60 김정배 이사장의 인생은 크게 두 가지 궤적을 그려 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하나는 고려대의 발전에 힘쏟은 교무행정가가 그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 대표적인 한국사 연구기관의 기관장을 역임하는 한편, 모교에서는 교무처장을 거쳐 세종캠퍼스와 본교 부총장, 본교 총장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맡아 학교 발전에 부단히 헌신해왔다. 지금은 휘문의숙 이사장을 맡아 모교인 휘문고에서 미래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는 그를 만났다.



고려대 사학과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고 어떤 계기로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는지요. 학생 활동 중에 혹시 기억 남는 활동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아주 훌륭했지요. 한국사 쪽에 김정학 교수, 신석호 교수, 동양사에는 정재각 교수, 김준엽 교수, 서양사 쪽에는 김성식 교수 등 좋은 분들이 있었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 귀감을 보여주는 분들이 많았지요. 
김정학 교수님의 지도로 한강 유역을 답사하던 시절의 사진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이가 김정학 교수고 맨 오른쪽 하단에 안경을 쓰고 앉아있는 이가 김정배 이사장이다)


당시 저는 대학에 진학할 때부터 고고학을 포함해서 한국 고대사 연구를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학과에 고고학을 전공하신 김정학 선생이 계셨어요. 김정학 선생이 이끄는 사학과 내의 ‘인류고고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한강 주변을 다녔는데요, 미사리부터 강화도까지 안 간 데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북한산을 답사하면서 거기서 ‘금위영이건기(禁衛營移建記)’ 비석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북한산에서 발견한 '금위영이건기' 관련 고대신문 기사(1962.9.22자)


또 대학 3학년 때 고려대 박물관에 있는 ‘수선전도(首善全圖)’가 김정호의 작품이라는 논문도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이미 고등학교에서 운영위원장 활동을 해서 대학에 가면 공부만 하겠다는 마음가짐이어서 1학년 때부터 교수 연구실에서 학문 연마에 전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입생으로 입학하셨던 1960년은 고려대 4.18 의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당시 직접 느꼈던 교내 분위기와 4.18에 대한 기억이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입학하고 나서 선후배가 만나면 우선 정부의 부정 선거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죠. 특히 부통령 선거 이기봉 씨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고 해서 나갔는데 환영회 분위기가 아니더라구요. 당시에 경제적으로 그렇게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수건을 하나 주는 게 아주 큰 선물이었는데, 그걸 머리에 쓰고서 데모를 하게 되었죠.

그때 그 학생들의 열기가 아주 순수하고 정의감에 불타서 국회의사당까지 가게 되죠. 국회의사당까지 가니까 유진오 총장 등이 나와서 “이제 뜻을 펼쳤으니까 서로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돌아가라”라고 해서 그걸 믿고 돌아가다가 종로 청계천에서 깡패의 습격을 받았어요.

그때 천일 이발관이라는 곳에 뛰어 들어 갔는데 우리 서너명을 숨겨주셨어요. 밖에서는 아우성 소리, 신음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제 나가겠다고 하니까 조금 더 있으라고 해서 조용해진 다음에 나왔더니, 길바닥에 돌덩이, 벽돌 별 게 다 떨어져 있었어요. 그 분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죠. 그 경험은 제가 사회 초년생이 사회와 국가의 여러 모습을 한 눈에 보는 큰 경험이 되었죠. 



고려대에 이사장으로 계시던 2012년에 고려대 출판부에서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이하 ‘실록’)>이 출간되는데요, 4.18을 겪었던 실제 주인공으로서 큰 감회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실록>의 필요성은 제가 고려대에서 교무처장을 시작으로 해서 부총장, 총장을 맡으면서 계속 느껴왔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학교에서 수유리까지 마라톤도 하고 기념식을 하고 있지만 관련 자료가 없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차에 제가 총장 재임 시절에 독고중훈(철학 57) 선배가 찾아와서 관련 자료들을 주었는데 그 때에 정리 못 하고 이사장이 돼서야 ‘실록 편찬위원회’를 통해서 근 1년 동안 자료 모으고 글 쓰고 해서 이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때 저의 마음은 만약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서려고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누군가 하겠지’ 하면서 많은 세월이 그냥 흘러버린 거예요. 이렇게 해서 제가 대학 1학년 때 겪었던 1960년의 4.18 의거가 52년만에 정리가 된 것입니다. 



당시에 문과대학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고 학생들은 어떻게 이용했는지요


서관에서도 강의를 듣긴 했지만, 문과대 1학년 때는 강의를 본관에서 많이 들었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도서관과 서관 이렇게 중심적인 건물이었던 거지요. 당시에도 학생들이 문과대학 건물을 서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좋은 이름은 아니죠. 총장이었을 때 서관을 교수연구실로 하고 강의실은 새로 신축하는 SK관으로 옮기고 싶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문과대 교수 연구실이 서관 밖의 여러 건물에 나눠져 있어서 아쉬운 점이죠. 
 

지도교수였던 이홍직 교수(우)와 교정에서



혹시 문과대의 대표적인 스승 김준엽, 조지훈 교수님과의 인연도 있으신지요. 


저를 학문적으로 이끌어 준 것은 사학과의 여러 교수님들이셨지만, 그 외적인 것은 김준엽 선생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중국에서 쭉 독립운동을 했고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폭넓은 연구를 하시니까 제가 생각하는 교수상과 비슷해서 제가 자주 찾아뵈었더니 저를 참 아껴주셨어요.

우리나라는 그 때 북한 자료 하나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어요. 고대사 하려면 더군다나 영역이 넓은데 해외에 나가서 자료를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1969년에 미국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부모님께서 결혼을 하고 보내겠다 하셔서 부랴부랴 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한 달만에 미국에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한 아내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김준엽 선생이 미국에 오시면서 제 결혼 사진을 가져오셔서 “내 아내가 이렇게 생겼구나”하고 했던 일화가 떠오릅니다.

김준엽 선생께서도 생전에 국무총리 등 숱한 정치계의 호출을 거절하고 학자로 또 교무행정가로 사셨습니다. 저 역시 민주당의 당대표직 등을 제안 받은 적 있지만 제가 수락하지 않았던 것도 역시 선생의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넓은 학문과 행정 등 평생의 훌륭한 지침을 선생님께 배운 것이지요.

그리고 조지훈 선생님과 인연은, 선생께서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으로 계실 때 역사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제가 선발되어 1년 이상을 곁에서 도와드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연말의 어느 날,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셔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저는 원래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선생께서는 그때 이미 건강이 안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대학원생인 저를 위해 술 한 잔 하시면서 갖고 계신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던 그 날이 떠오릅니다. 



1970년에 교수로 부임하시게 되고 교무처장, 서창(세종)캠퍼스 부총장, 본교 부총장을 거쳐 IMF 직후인 1998년 제14대 총장에 선출되셨습니다. 취임사에서 “20세기 마지막 총장이자 21세기 첫 총장”이라고 강조하셨는데 재임기간 동안 어떤 것에 주력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총장 시절에 가장 전력한 것이 ‘국제화’와 ‘정보화’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총장이 되기 전, 교무처장, 부총장을 하면서부터 간절하게 그 필요성을 느낀 것이었습니다.

우선 국제화를 위해서는 위생과 청결이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당시까지 고대는 모든 길이 흙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를 하면 흙먼지가 날려 계단마다 쌓이고, 비가 오기라도 하면 흙탕물이 되어 아주 지저분하고 불편했지요. 제가 외국의 유수 대학을 다니며 느낀 것은 나무가 우거지고 깨끗한 것이 학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내에 아스팔트를 깔았고, 또 고질적인 문제인 화장실도 개선했습니다. 특히 ROTC 건물에 당시로서는 필요 없었던 여자 화장실을 미리 만들어 둔 덕분에 다른 학군단으로부터 부러움을 많이 받았지요.

또 ‘정보화’를 위해서 원스톱 서비스 센터 개설, 지식기반 포털 사이트 구축 등을 시행했습니다. 사실 정보화는 국제화를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해외 학계와 교류를 하려면 온라인이 뒷받침 되어야 했거든요. 



그때 하셨던 일들은 결국 다 선견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동장 대신 지하 주차장을 만들고 중앙광장을 녹지화한 것, 온라인 시스템 구축 등은 재정이 꽤나 많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예산을 확보하셨는지요? 

이런 개혁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구조 조정, 절약을 목표 삼아 우선은 교직원의 2차 문화를 없애 예산 낭비를 막았습니다.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학교 전체적으로 보면 큰 돈을 아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손을 벌린다고 해서 기업들이 선뜻 큰 금액을 내놓지 않죠. 그래서 우리의 비전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조조정을 실시했습니다. 당시에 인건비 비율이 너무 높았거든요. 물론 불만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지만 누군가는 욕을 먹어야 일이 된다는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모금 활동이 재계와 교우 등의 협조로 성공적인 결과를 맺게 되었고, 중앙광장은 총장인 제가 추진하며 완성하였지만 그 비용은 재단에서 지출하는 형태로 훌륭하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고 김병관 이사장의 협조가 돋보이는 장면이고 재단과 학교의 협조가 성공을 거둔 일대의 쾌거였다고 생각합니다. 


* 본 인터뷰는 고려대 박물관 ‘역대 총장 회고 구술 사업’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전용호 고려대 박물관 대학기록실 특임교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